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브주라 전투 (문단 편집) === 종말 === 결국 9월 22일이 되면서 모든 보급품이 고갈되고 포위망 탈출에 실패한 폴란드군이 모조리 [[항복]], 폴란드군은 더 이상의 반격 여력을 상실했다. 이 전투에서만 폴란드군 2만여 명이 [[전사]], 17만여 명이 [[포로]]로 사로잡혔으며, 독일군도 6천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22만 5천의 폴란드군 가운데 반격을 이끌었던 쿠트셰바 소장을 포함하여 제15보병사단과 제25보병사단, 비엘코폴스카 기병여단, 포돌레 기병여단만이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했다. 이들 대부분은 19일과 20일 사이 캄피노스 숲을 경유하여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포위망을 벗어났다. 19일의 불카 벵글로바(Wólka Węglowa)에서는 폴란드 2개 [[기병]][[연대(군대)|연대]] 1천여 명이 [[전차]] 37대를 장비한 독일군 2천3백여 명과 전투를 벌여 포위를 탈출하는 일도 있었다. 비록 포위를 뿌리치고 바르샤바로 이동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이 용감한 기병대는 이날 하루 동안에만 무려 20%의 병력 손실을 기록했다.[* 돌파를 이끈 에드바르트 고들레프스키(Edward Godlewski) 대령은 이후 폴란드 국내군(Armia Krajowa)에도 참여했다가 이후 독일에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참고로 [[이탈리아 왕국]] 기자인 [[https://en.wikipedia.org/wiki/Mario_Appelius|마리오 아펠리우스]](Mario Appelius)가 이 돌격을 목격했다. 아펠리우스는 이 돌격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이 기록은 '''폴란드 기병의 대전차 돌격'''이라는 독일의 선전에 그대로 이용되었다(...). 정작 아펠리우스는 기록에서 폴란드 기병들의 용기에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제 딴에는 칭찬한다고 기록을 남겨 놨겠지만...][*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9월 1일 크로얀티(Krojanty)에서 포모제 기병여단이 감행한 기병돌격이 있다. 포모제 기병여단 소속 제 18 울란연대 일부가 후퇴하는 아군을 엄호하기 위해 추격해 오는 독일군을 상대로 기습 돌격을 가한 것인데, 돌격 자체는 성공했으나 도중에 갑자기 나타난 독일군 [[장갑차]]의 포화에 노출되어 기병대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나중에 독일의 전쟁 특파원들과 이탈리아의 기자 2명이 현장을 찾았는데, 이탈리아 기자들 중 한 명이던 [[https://en.wikipedia.org/wiki/Indro_Montanelli|인드로 몬타넬리]](Indro Alessandro Raffaello Schizogene Montanelli)는 폴란드 기병대의 용맹을 칭찬하는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독일 측에서는 '폴란드 기병대가 독일군의 전차를 골판지로 만든 것이라 착각하고 무모하게 달려들었다가 전멸했다'는 식의 거짓 선전을 해 댔다.] 제4, 14, 17, 26, 27보병사단은 18일부터 22일 사이에 투항했다. 22일의 폴란드군 전사자 중에는 제4보병사단을 지휘하던 [[https://en.wikipedia.org/wiki/Miko%C5%82aj_Bo%C5%82tu%C4%87|미코와이 보우투치]](Mikołaj Bołtuć) 소장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워미안키(Łomianki)에서 독일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바르샤바를 향한 혈로를 뚫으려던 도중 총에 맞아 전사했다. 24일에는 캄피노스(Kampinos) 숲에서 폴란드군의 잔여 병력이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상황이었다. 브주라 전투는 폴란드 침공 당시 벌어진 최대의 전투였으며,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폴란드군이 치른 모든 전투 중에서도 투입한 병력의 규모와 피해가 가장 큰 전투였다. 또한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독일은 폴란드 침공에서 완전히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브주라 전투는 초기의 반격으로 바르샤바를 향한 독일군의 공세를 잠시 늦추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독일군에 역공을 당하면서 오히려 폴란드군 전체 전력의 약 1/4과 폴란드 서부 지역 대부분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브주라 전투에서 입은 손실과 17일에 있었던 [[소련]]의 동부 국경에서의 파상 공세로 인해 폴란드 정부는 본국에서의 저항을 단념하게 되었고[* 보통 소련을 전쟁에서 다 이기던 독일로부터 아무 역할도 하지 않으면서 폴란드 동부 영토를 무혈로 [[먹튀]]한 걸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당장 '''폴란드 정부가 18일 [[루마니아 왕국]]으로 이동한 이유도 소련의 침공 소식을 접한 다음날 본국을 포기한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또한 폴란드군의 병력의 상당수가 아직 남아 있었고, 또 장기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던 독일군의 탄약 및 공군 보유 폭탄 재고가 고갈 직전이었음을 생각하면 '''소련은 폴란드 침공에서 굉장히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당장 루마니아 국경 지대에서 대독 항전을 준비하던 35만 폴란드군의 대부분은 소련에게 먹혔으며, 7천여 명의 전사자와 2만여 명의 부상자, 24만여 명의 포로가 소련과의 전투에서 발생했다. 폴란드 침공 기간 동안 폴란드 측에서 전체적으로 전사자 6만 6,300여 명, 부상자 13만 3천여 명, 포로 66만여 명이 발생한 것을 생각하면 소련도 폴란드의 패배에 큰 역할을 한 것. 다만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한 시점에는 이미 폴란드군이 독일군과의 전투로 큰 타격을 입고 패주한 상황이었고, 독일과 소련의 양면공격으로 패배가 확실해졌으므로 폴란드군의 사기도 낮았다. 따라서 단순히 전사자와 포로 숫자만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루마니아 왕국]]으로 이동하였으며, 이후 10월 6일에는 본토의 폴란드군이 모두 항복하며 폴란드 침공이 종결되었다. [[분류:폴란드 침공]][[분류:1939년 전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